2017-
*
지난 11월,
여름에서 겨울의 초입으로 넘어가던 5개월여간 함께 울고 웃었던 인문학 수업 선생님들과 우리들만의 문집을 만들고 활동을 마무리 했다.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과 내면이 바닥까지 내리쳤던. 내밀하고도 적나라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다듬어 글들을 썼다. 그 누구도 의식하지 않았다. 생살을 째어 헤집어 내보이는 쾌감이 느껴졌다. 부모님 연배의 선생님들은 나보다 더 한 감수성과 격정을 앓고 계셨다. 가식없는 시간들이었다. 다들 그렇게 속을 내보였다.
무기력증에 시달리다 혼자 집에서 낮술을 마시고 내 쓸모에 관한 자괴감을 한 번에 써내려간 글을 나누었던 밤, 모임을 이끌던 작가님께 이메일이 한 통 왔다.
'쓸모'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쓸모'란 사람을 도구로 쓰고 싶은 사람들 욕망이 만들어 낸 벽이에요.
쓸모가 없다는 건, 어찌 보면 하나의 쓸모에 갇히지 않겠다는 거죠.
그러니 쓸모 따윈 던져버려요.
간결하지만 깊이있는 결론이다.
장문의 이메일 말미 무심하게 덧붙이신 저 말씀에 위로를 얻었다.
그러니 쓸모 따윈 던져버려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날 다독여주었던 귀한 시간들이었다.
모임이 종료되고 더 깊은 추위가 찾아왔고 얼마 지나지않아 한 살을 더 먹었다.
우리는 두어권씩 책을 챙겨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이따금 생각나는 날이면 안부를 묻는다.
*
손등에 두어번 헛가위질로 깊은 상처를 남겼던 그 시험에서 나는 가까스로 합격했다. 슬렁슬렁 문화센터에서 가위질을 배운지 일 년 만의 일이다. 그리고 벌써 몇 달이 지났다. 미용면허를 취득한 뒤 근처 노인복지센터내 미용실에서 한 주에 하루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일흔을 이제 갓 넘긴 젊은 할머니도 아흔이 넘은 늙은 할머니도 다 똑같은 파마를 완성해 미용실 문을 나선다. 흡사 요시노 이발관의 노인판을 보는 듯하다. 모두가 통일된 짧고 빠글한 파마. 게다가 죽음에 관한 농담이 완성되는 곳이다. 이정도면 살만큼 살았네. 고만 사시오. 감히 할 수 없는 말들이 허공을 뛰어다닌다.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웃는다. 생경하고 놀랍다. 내가 하면 농담이 될 수 없는 말들이겠지만.
살냄새가 곳곳에 베여있다. 특히 단체로 식사를 나누는 식당엔 노인들 특유의 체취가 밀집되어있어 나는 서둘러 밥을 먹고 미용실로 돌아와 급하게 향수를 꺼내곤 한다. 아직은 이르다. 선의를 가지고도 감당할 수 없는 분야는 분명히 있다. 나는 아직 스스로와 합의점을 찾고 있다. 밥을 빨리 먹고 향수를 꺼내는게 지금까지의 최선이다.
여행을 다녀오느라 비운 한 달 동안 나를 제외한 두 명의 봉사자가 기꺼이 내몫까지 해주셨다. 페루에서 사온 예쁜 파우치 두 개를 따로 챙겨두었다. 색이 아주 곱다. 좋아하실거다.
*
살렘의 왕을 만날 때가 종종있다.
간혹은 모든 만남이 끝난 후에 폭풍처럼 느껴지는 때도 있지만 관계에 집중하고 있는 순간에는 금방 느끼곤 한다.
거창한 계획을 세워주거나 삶의 전반적인 부분을 흔들만큼 큰 인연은 쉽지 않다. 아마 아직까진 인생을 통틀어 두어번 정도.. 인것 같다. 게다가 그것들은 아주 오래전 기억이다. 대신 소소한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사람들을 간혹 만난다. 나는 그들 모두를 살렘의 왕이라 부른다. 시야가 크고 그릇의 깊이가 나와는 다른 사람들.
나는 아직 허세를 못버리고 궁금해 할 때가 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살렘의 왕이 될 수 있을까.